삶의 의미를 찾아 가꾸어야 한다.
당신이 지금 웃으며 그 곳에 서있듯이, 나도 한때는 웃으며 그 곳에 서 있었소.
내가 지금 여기에 누워 잠들어 있듯이, 당신도 언젠가는 이런 곳에 잠들 것이요.
어서 돌아가서 나를 따를 준비를 하시오. (묘비명을 대신하여 씀)
삶과 죽음은 반대어나 반의어가 아니고 대칭어는 더더욱 아닙니다. 같은 방향의 행동을 시각에 따라 달리 표현할 동의어입니다. 즉 삶이 죽음을 향한 과정임은 피할 수 없는 신의 섭리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동물가 다른 것은 나름대로의 ‘삶의 의미’를 찾아나간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어느 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유명한 회사에서 사원을 뽑는데 『학력, 연령, 성별, 외모, 체격』불문이라는 광고를 냈습니다.
다른 회사들은 한결같이 ‘대학졸업’ ‘외모단정’ ‘신체건강’을 조건으로 내세우는데 이 회사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데다가 『본 회사에서는 4년제 대학 졸업 신입사원의 월 평균 임금인 1,500$를 매일 지급하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한 달에 6,000$씩 준다는 얘기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회사에서는 제비뽑기로 100명을 뽑았습니다.
“입사를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각자의 사무실에 가시면, 책상에 16절지 종이가 쌓여 있을 것입니다. 종이 좌우에는 점이 쭉 찍혀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실 일은 점을 따라 줄을 긋는 일입니다. 근무는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까지이며 책임량은 없습니다. 성실하게만 해주십시오.”
모두 신이 났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동료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책임량 때문에 골머리 앓을 것도 없이 줄만 그으면 되는데다가 일주일에 1,500$을 준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출근 첫날에는 모두 열심히 줄을 그었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나흘째부터는 달랐습니다. 일이 너무 지루했습니다. 참다 못한 몇 사람이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종이에 왜 줄을 그어야 하는 거냐? 그걸 어디에 쓸거냐? 우리를 실험하느냐? 못 배우고 불쌍하다고 적선하는 거냐? 차라리 밖에 나가 땅을 파거나 쓰레기를 주으라고 해라. 이런 일도 일이냐? 줄 그은 종이가 필요하다면 인쇄해서 쓰면 될 것 아니냐?”
그리고는 몇 사람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결국은 얼마 후 모두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힘들어하고 결국엔 그 일로부터 떠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살기가 어려울 때는 의미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삶을 위해 각자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 일을 합니다. 살아가는 의미의 발견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요건이 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사원들에게 승진, 월급, 선물, 지위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만큼은 어느 누구도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찾아야 하고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할 몫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교실에 오래 앉아 있다 해도 의미를 찾지 못하면 학습은커녕 공부가 싫기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하는 공부에 의미를 찾아내어 그 의미를 가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